자기계발

시비를 따지더라도 감정을 얹지 마라, 개미의 발소리(1편)

진우스님 개미의 발소리

일반인으로서 불변하지 않으며 살기란 어려운 것 같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간다는걸 인정하고,
시비를 따지더라도 좋으니 싫으니 하는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세상을 지혜롭고 평화롭게 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보시란 내것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가진 집착을 내려놓는 일이다.

목차

진우 스님

대강백 백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
제18교구 본사 백양사 주지 역임
2022년 조계종 37대 총무원장

머리글

고와 낙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고락의 분별업을 버리라는 것이다.
좋다고나 싫다고 분별하며, 좋은 것은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버리려 하는 그 마음이 우리를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1. 나뉠 수 없는 하나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간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연기법(모든 현상이 생기하고 소멸하는 법칙)이라고 한다.

행복은 불행에 의지해 생기고 불행은 행복에 의지해서 생긴다.
행복과 불행의 질량은 같으며 어느것의 성향이 더 강하지도 않다.
다만 젊은 시절의 인과로 인해 늙음의 때가 오듯 그것들이 오는 시기가 다를 뿐이다. 한마디로 전체 인생에서 행복의 총량과 불행의 총량은 대체로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로서 가장 좋은 교육 방법은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줌으로써 스스로의 인생에 최선을 다하도록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분별심을 멸하게 해서 언제 어디서든 편안한 마음을 갖게한다.

진정한 선택이란 본능과 욕심에 따르는 선택이 아니다.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고 무심한 마음으로 하는 선택이다.
무심한 마음은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최선의 선택을 하게 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며 어떠한 과보가 오더라도 기꺼이 책임지고 받는 자세가 중요하다.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여한 마음, 이것이 괴로움이 생기지 않게하는 가장 확실한 방편이다.

중도란 분별심이 사라진 이후에 찾아오는 느긋하고 편안한 상태라고 이해하면 쉽다.

진정한 자비심이란 상대에게 좋다거나 싫다는 고락의 감정을 주지 않으면서 도움을 주는 행위이다. 이는 진정한 중도행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식과 지혜는 다르다. 지식이 보태고 더하는 공부라면 지혜는 덜어내고 비우는 교육이다.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고 무조건 좋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영원히 좋은것도 나쁜것고 없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연에 따라 연기된 외형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사는것, 쉽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산다면 나쁜 인연은 저절로 끊어진다.

인과에 따른 고통과 괴로움은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으니 보고 듣는 마음 밖의 일에서 벗어나 모든일을 초연하게 대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 지혜라 할 것이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게 연기의 법칙이다.

옳거나 그르고, 좋거나 나쁜 것은 본래 없다. 자연으로 돌아보자.
연기의 순리에 따라 인연이 맺어질 뿐이다.
어쩌면 도에서 가장 멀리 있는 존재는 우리 인간일지도 모른다.
좋으니 나쁘니 하면서 하지 않아도 될 분별을 해서 인과를 만든다.

행복과 불행은 달라보이지만 하나의 인과로 묶인 대립의 쌍이며 서로가 서로의 과보이다.
그러므로 보이지도 않는 행복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행복이다 불행이다 하는 분별을 하지 맣아야 한다.

시비를 따지더라도 좋으니 싫으니 하는 감정까지 일으켜서 덧붙여서는 안 된다.

참선을 통해 경지에 오르면 괴로움이 사라지고 한 톨의 근심이나 걱정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중도에 머물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이 순간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일어나는 즉시 내려놓아야 한다. 놓아버린다는 것조차 없어야 한다.

어찌되었든 좋으니 싫으니 고락의 분별을 하지 않고 인과를 믿는다면 걱정이나 근심을 할 일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런일이 생기건 저런 일이 생기건 그저 인과의 모습이려니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글이는 편이 좋다. 이것이 중도이고 반야에 접어드는 길이다.

젊은 나이에 급제해서 승승장구하던 맹사성은 문틀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인과가 작동하는 원리를 조금이나마 깨우쳤던것 같다.

보시란 내것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가진 집착을 내려놓는 일이다.
내가 무엇을 베풀었다는 생각이 사라진 무주상보시가 강조되는 이유이다.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보시가 아니라 분별이어서 복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분별업을 소멸하는 최선의 미덕으로 보시가 장려된 것이다.

현명한 이들은 오가는 것에 절대로 집착하지 않는다.
세상이 움직이는 모습은 인과와 연기를 벗어나지 않기에 얻거나 잃는 법이 없고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보는 법도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얻는다고 해서 좋아하지도 않고, 잃는다고 해서 상처받지도 않는다.
당장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사로잡혀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좋고 싫음을 분별하고 있다면 재빨리 인과의 늪에 빠져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게 삶이다. 세상이란게 원래 그렇게 생겼다.
얻었거나 잃었다는 분별심을 내려놓고 인과와 인연에 따라 그렇게 된것이려니 생각하면 홀가분해진다. 차츰 집착이 사라진다.

모든 것은 마음 밖에 있지 않다. 우선은 나의 분별심이 있었기 때문이고 인과의 법칙이 작용해서 과보가 드러났기 때문이며, 이 과보가 다시 습기가 되어 나의 업식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장하되 집착하여 따질 필요가 없고 감정을 얹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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