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것은 어떻게든 오고 갈것은 어떻게든 간다.
나중에 후회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며 살았던 시간이다.
2.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
밀물이 있으니 썰물이 있다. 반대로 밀물이 없으면 썰물도 없다. 이것은 필연이다.
모든 일은 하나가 있기에 반대의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베풂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는 있지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떤 선택을 하든 인과의 과보를 피할 수 없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인과의 법칙은 과보를 불러오게 마련이고 과보는 고와 낙이라는 현실 세계의 번뇌를 불러들인다.
원하는 것을 성취함으로써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 행복은 그것의 인과로 말미암아 슬픔과 괴로움, 불행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행동과 행위에 최선를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시절인연과 인과연기에 모든걸 맡겨야 한다.
사람관계 역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기하는 관계이므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시비로 재단하면 안된다.
시비를 따지는 순간 나한테는 분별심이 생긴다. 나의 기분이 좋고 나쁨이 인과라는 밭에 씨앗을 뿌려서 그 과보를 고스란히 받게 된다. 누군가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하거나 심지어 참기 힘든 욕설을 하더라도 분별업을 짓지 않으려면 그냥 넘어가는 게 좋다.
지금 나에게 벌어진 일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타인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남의 탓을 일삼는다면 나의 악업만 쌓이는 결과를 낳는다.
불교에서는 악업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 참회를 권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생성 변화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관련되어 있으면 생로병사라하고 우주 전체를 설명하는 말로는 성주괴공이라 한다. 이러한 변화가 끝없이 반복된다.
업이란 지난 생에 행했던 행위의 집적물로 세가지로 분류하여 삼업이라 한다.
몸으로 짓는 업, 말로 짓는 업, 생각으로 짓는 업이 그것이다. 업은 우리 내면의 식에 저장되는데 이것을 일러 업식이라 한다.
색이 공함을 알게되면 실체 없는 공에 집착할 이유가 없어진다.
오욕(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과 삼독(탐진치)의 유혹에 끄달리지 않게 되어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종교는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한다.
현세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다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세상이 이 처럼 단순하지 않다.
세상에는 상대적인 현상들로 가득차 있다.
이 대립된 개념은 하나의 인과로 묶여서 시절인연을 만나 과보로 나타난다.
외부의 어떤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과 실행을 통해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기에 불교를 자력신앙이라고 한다.
고도로 발달한 종교일 수록 타력신앙에서 탈피해 자력신앙 쪽으로 기울게 마련이다.
마음의 재산이란 인과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지 재물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재물에 대한 믿음을 지워버리는게 바람직하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부터 매장보다 화장 문화를 선호했다. 해서 명당을 찾는 행동이 왜 부질 없어 보이는지 몇 마디 얹어보려 한다.
좋은일이 생길수록 좋으니 싫으니 분뱔하는 마음을 내지 말고 인연에 따라 조신하게 순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연법에 따르면 올것은 어떻게든 오고 갈것은 어떻게든 간다.
오는것을 억지로 막거나 가는것을 억지로 잡는다면 오는 것도 고통이고 가는것도 고통이 된다.
애만 쓰다가 사람만 축나고 만다.
빡빡한 삶의 굴레에서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을지라도 가능하면 멀리 내다보고 사색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욕망과 탐욕의 감정에 이끌려 정신없이 살기보다는 좀 더 현명한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다.
동전의 어떤면이건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그 동전의 다른 면도 함께 손에 쥐는 것이다. 그런 것이 인과이다.
항상 인과를 기억하고 분별심이 올라올때마다 그것을 내려놓으라.
아니 인과를 안다면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일을 겪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분별심과 인과로 인해 생긴 업의 그림자이다.
원인으로 인해서 결과가 생기고 결과는 다시 원인이 되어 다른 결과를 발생시킨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순환 고리를 연기라 하셨고 연기의 이치에 따라 인연과 과보가 윤회힌다.
좋은 일이더라도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이래저래 계산적으로 한 행위들은 물론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겠지만 커다란 화복의 흐름을 바꾸는 힘이 없다.
요령이나 피우고 재주나 부리며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혹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 아무리 용을 써도 결과적으로는 이익이 될만한게 없다.
인과의 과보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삶을 돌아볼 계기가 있었던 사람들은 안다. 자신이 후회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며 살았던 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목적을 향해서 열심히 노력하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좋다거나 싫다고 하는 감정에 집찰해서는 안된다.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도 조급하게 굴지말고 불의를 제거하는 일에도 근심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그래야 악업이 붙지 않아서 제대로 된다.
욕심은 무언가를 비교하여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분별심이다.
현대인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수행은 많다.
어떤일이 생기더라도좋다거나 싫다는 고락의 감정과 옳다거나 그르다는 시비의 판단을 자제할 것,
어떤 선택이든 빠르게 판단하고 결단하되 선택한 다음에는 더 이상 집착하지 말것,
그래도 힘에 부칠때는 보시를 하면서 꾸준히 기도와 참선에 정진할 것.
이 세가지만 지속하더라도 머지않아 차츰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