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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개미의 발소리(3편)

진우스님 개미의 발소리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방법은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더 잘 살지 않고 욕심이 없다고 해서 더 불행하지 않다.
좋은 일이 생기는 만큼 나쁜 과보가 따른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목차

3.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인간의 삶은 언제나 이렇게 할 것인가 저렇게 할것인가 하며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있기 때문에 완전한 무분별심을 갖기란 절대 쉽지않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정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이 당연한 행동일테지만 당장 나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때야 말로 중도를 발휘해야할 시기이다. 유리하다거나 뷸리하다는 것도 분별심이다. 이러한 분별심을 내지 않고 정의를 택하는 것이 중도행이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더 잘 살지 않고 욕심이 없다고 해서 더 불행하지 않다는 점이다.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해서 일이 더 잘 풀린다거나 조급하지 않다고 해서 일을 잘 못한다고 할 수도 없다.
그리고 화를 낸다고해서 원하는 것이 더 빨리 이루어진다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고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균형을 잃어버린 마음들은 자신의 감정을 흔들어서 결국 기분만 더 상하게 된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대의 잘못이 명백하다고 할지라도 결국 기분이 상하는 당사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옳다 그르다 하는것은 매우 주관적이며 설사 옳고 그름이 명백하더라도 인과의 질서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옳은 것도 영원히 그른것도 없다.
따라서 기를 쓰고 따질 필요도 없다.

 

이렇게 되건 저렇게 되건 낙업이 드러날 시기여서 바라던 일이 성취되고 고업이 드러날 시기여서 원치 않던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편안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라고 성취하려고만 들지 말고 편안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인과의 도리에 맡기는 것이다.
원한다고 성취되고 원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왜 안되느냐며 집착하고 미련을 가질 수록 자신만 힘들어진다.

 

관세음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이후 미륵부처님이 출세하시기 전까지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시는 보살로서 관세음은 세간 모든 중생의 소리를 살핀다는 뜻이다.

 

현실세계는 오로지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이 생긴다는 연기법의 기초 위에서 생성되고 소멸한다.

 

그렇다고 불의를 보고도 분별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거나 아예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살아가라는 것으로 오해하면 곤란하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는 측은지심이 생겨 도움의 손길을 주는 것이 보시이고, 갈등상황이나 정확한 결정이 필요할때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 지혜이다.
이렁 행위들을 바라밀행이라 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연기라고 한다. 연기는 흐름일뿐 좋거나 싫거나 하는 감정적 요소가 없다. 당연히 얻거나 잃는 것도 없고, 오거나 가는 것도 없다.

 

자식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부모가 관여할 수는 없다.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잇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이 훨씬 현명하게 처신하는 길이다.

 

모든 병은 집착에서 온다. 집착은 순리를 거스르며 감정을 건드린다. 기분을 들뜨게 하고 극단적인 감정을 솟게 한다.
그러나 집착하지 말고 일이 잘되지 않더라도 기분이 상하거나 감정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집착은 분별을 불러오고 분별은 감정을 불러오며 감정은 업식으로 잠재되어 무르익다가 시절인연을 만나서 과보로 드러난다.

불교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종교가 아니라 원하는 마음마저 놓아버리는 종교이다.
갖지 말고 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가진다거나 버린다는 분별을 떠나라는 가르침이다.
채울 필요도 없고 버릴 필요도 없는 허공 같은 마음이 바로 불교이다.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냥 놓는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점을 보러 가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하면 좋고 저렇게 하면 나쁘다는 등의 방편을 써서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데 어쩌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물론 인연 따라 온 일이니 좋다느니 싫다고 분별하지 않는 마음으로 집착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다면 별문제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든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가타서 방편을 따른다면 정말 위험해진다.
좋은 일이 생기는 만큼 나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지혜로운 삶, 아름다운 명상

결단을 내릴 때도 단호함을 지니되 그것이 방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좋고 싫다는 고락의 감정을 얹어서도 안되며,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분노의 감정을 얹어서는 안된다.
고락의 인과가 생겨서 마음만 괴롭힐 뿐이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그대로 부처이고 이를 깨침이라고 한다.
노스님께서는 만행을 떠나는 스님에게 이 점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우리들의 가장 큰 딜레마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놓고 다시 그 문제를 풀려고 애를 쓴다는데 있다.

 

옳은 것이나 좋은 것에 집착한다고 해서 그른 것과 나쁜 것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과에 끄달리는 심리 상태 때문에 더 커다란 불편과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불교적인 삶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업장을 소멸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와 복덕을 갖추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을 투철하게 이해하고 구족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일상에서의 수행이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어느 것이 더 좋을지 고민 없이 자유로운 마음 상태에서 행동하는 것을 중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옳고 그름의 분별을 하지 않고 감정이 동요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평소에 이렇게만 하더라도 신,구,의 삼업으로 인한 과보가 조금씩 줄어든다.
좀 더 신속하게 죄업을 닦아내려면 참선과 기도, 보시와 정진의 힘을 빌릴 수 도 있다.
염불 수행이나 다라니 등 주력 수행의 공덕 또한 적지 않다.

 

개인의 행복과 불행은 각자 가지고 있는 업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좋다 싫다 하는 고락을 분별하는 데서 인과가 발생하며, 시절인연에 따라 과보를 불러온다.

 

간단히 말해서, 제는 귀신을 섬기는 일이지만 재는 영가에게 불법을 전하는 일이다.

 

계율은 세속적인 분별심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비유할 수 있다.
손가락에 집착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면 계율의 가치는 사라진다.

 

편한대로 재단하고 시원하게 비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다.
과보만 쌓인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거나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어서도 안 된다.
실상은 그것과 전혀 딴판일지도 모른다. 사실 당연한 것은 없다. 더구나 내가 아는 것은 언제나 제한적이다.

 

방문을 열어두었어도 벌은 자꾸만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다.
살면서 이런 장면을 여러번 보아을 것이다. 자신의 업식에 녹아 있는 집착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다.
어쩌면 저 벌은 활짝 열어 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계속 창문에 머리를 부딪치다 죽을지도 모른다.
속지말라고 하시는 큰스님들의 말씀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속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분별하고 집착하는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말이다. 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나면 열린 문으로 언제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다.

 

공부가 최상에 이르면 어떤 구속에도 제한되지 않고 거리낌이 없어진다. 근심과 걱정이 업어진다.
당연히 바라는 것도 없고 못마땅한 것도 없다.
삼라만상이 연기법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사라지는데 인연에 따라 생기고 인과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을 두고 마음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연기법에 맡겨놓고 나는 감정만 제어하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얻은 진리를 세속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지 오랜 시간 고민하셨다.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 단 여섯 글자의 염불 ‘나무아미타불’이다.
사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항상 외워도 우리 의식은 맑아진다.
의식이 맑아진다는 건 순수함이 회복된다는 증거이고, 이는 곧 무욕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좋다거나 나쁘다는 분별심을 가지고 잇는 한 좋은 일과 나쁜 일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 원리를 공간에 적용해도 같다.
특히 동양에서는 이사할 때 좋은 날짜를 잡고 좋은 방향을 찾아야 화목하고 풍요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좋은 시기와 장소를 찾는다고 해서 시절인연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당장 심리적 만족은 있을지 몰라도 인과를 바꿀 수는 없다.

 

사실 인과를 이해하면 사는게 좀 여유로워진다.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그 시기가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바닥을 치고 나면 다시 회복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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